2020년 8월 24일 월요일

천사의 얼굴

 

천사의 얼굴 (행 7:54-60)


누가 천사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은 볼 수 있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고 했다.


◉ 얼굴 = 마음의 거울이다. 인상 = 심상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천사의 마음을 가졌기에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천사의 사랑을 가졌기에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내면의 상태에 따라서 계속 변한다.

내면의 세계가 불만, 불안, 불평, 원망, 짜증, 낙심, 피곤, 근심... 등으로

마음이 찌들어 가면 외면의 얼굴도 그렇게 변한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행복하고 은혜로 충만하면 얼굴도 밝아지고 환해진다.

마음의 행복이 얼굴의 행복이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어린이에게서는 티없는 깨끗한 얼굴은 본다. 그래서 아기를 보면서 천사와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점점 세월을 타고 커가면서 해 맑은 얼굴이 변해서 추한 얼굴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육체 주도적인 인간 :

육신적인 욕망에 끌려 사는 인간을 말한다.

이것은 동물적이고 본능지배적인 인간이다.

2) 이성 주도적인 인간 :

그가 가진 지식과 양심과 도덕성에 따라서 살아간다. 그것도 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성 자체가 타락하고 병들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병든 이성, 병든 정신 때문에 도덕성도 다 무너져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영 주도적인 인간 :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 라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형상 (히: 그무스, 헬: 에이콘)이다. 인간은 영적존재라는 말이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육신을 흙으로 빚으셨으나,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이 범죄하고, 그 영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전체가 망가지는 것이다. (인간성, 도덕성, 사회성.... 모든 면에서 부패)

인간은 육체를 가졌으나, 육체는 ➡ 이성이 지배하고, 이성은 ➡ 영성이 지배한다.

그래야 바른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 문제는 영이 타락되어서 온 인격, 온 성품, 모든 인간성도 다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워 져야한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인하여 비로소 인간의 영이 다시 회복된다.

이렇게 다시 회복되는 것을 = 중생, 거듭남, Born Again 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말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와 사망과 사탄과 죽음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자유의 영,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 <충만>이라는 말이 나온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면서 그의 이성과 육신적인 욕망과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완전히 붙들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 그의 판단, 그의 이성, 그의 육체적 욕망까지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스려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 때 거기에 자유 함이 있는 것이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 본문에는 스데반을 통해서 성령 충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은 지금 순교를 앞에 두고 있다.

그는 지금 자기를 죽이겠다고 을 던지려는 사람들 앞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돌을 던진다. 정당한 재판도 없이 끌어내서 돌로 쳐 죽인다.

이런 부조리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본다.

땅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은 본다.

영안이 환하게 열리다. 이것이 중요하다.


(예)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갈 때, 제발 땅을 보지 말고,

부디 하늘을 볼 수 있는 성령충만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이 세상 것 볼 것 없어요. 미련없다. 잘 했다.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늘나라만을 우러러 보는 그런 영적인 상태, 이것이 충만함이다.

땅에 매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영생을 바라 본다.

지난 날에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고, 아쉬운 일도 많고, 불만스런 일도 많다.

그러나, 싹 지워버리고, 스데반처럼 하늘을 바라봅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본다.

(예화) 목회하다 보면, 성도들의 임종을 본다. 세상 떠나는 성도들을 본다.

그 순간에 과거를 생각하며, 후회도 하고, 누구를 욕하는 사람도 있고, 짜증내는 사람도 있다.

불만, 원망으로 가득 차기도 하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싹 지워버리고...

앞에 열리는 영원한 나라, 천국을 바라봅니다. 찬송 부르며 감사하며 천국에 가야 한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 하늘이 열린다고 했다.

임종의 시간에 하늘 쳐다보며 하늘이 열려야 지요.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니다.

그랬더니 본문에 귀한 말씀이 계속 된다.

2)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경 전체에서 이 말은 딱 한번만 나온다.

누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했나요? <인자>가...

즉,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인자>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기독론적 차원에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주제이다.

(예) 신학교에서 (인자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 <인자>라는 말을 약 50번 이상을 사용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자들조차도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지 직전에 딱 한번 이 표현을 한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에 대한 <인자>라는 말은 구약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것을

인용한 자기 계시적 표현이다.

(단 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인자>, 그는 장차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만왕의 왕이요. 심판 주가 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가 바로 <인자>이시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재판 받을 때에도 말씀하셨다.

(막 14:61)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 때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다.

<인자>는 가장 높은 이름이다. 그래서 인자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 볼 때 하늘이 열렸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이다.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서셨다고 했다. (왜 일까?)

평소에는 앉아계시다가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너무 너무 감동이 되어서 

벌떡 서신 것으로 해석된다.

그 순간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억울한 것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

스데반에게는 오직 하늘의 영광과 성령의 충만함만이 있었다.

3) 그 결과로 <원수>가 없다.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고 인자를 보는 순간, 다 용서하고 더 이상 원수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죽어 가면서 드린 기도가 무엇입니까?

(행 7:60)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다르게 자신의 책임과 허물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 저들을 격분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죄를 그들에게만 돌리지 말아 주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원수가 없다. 다 용서합니다.

끝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4)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돌에 맞아 순교하는 사람의 얼굴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요? 얼굴이 환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젊은 사람이 있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다.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놓고 깊이 연구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바울 신학>을 연구 할 때 이것을 말한다.

그 때 청년 사울이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저렇게 광채가 나고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나?

충격 그 자체였다. 사울은 스데반의 포로가 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바울 신학 사상이 스데반의 설교에서 다 묻어 나온다는 사실이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선교적으로 사울을 사로잡았다는 말이다.

어떻게? 돌에 맞으면서도 그 모습이 성령 충만하여 천사의 얼굴을 갖고 순교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위대했다말없는 말을 한 것이다.

마침내 사울은 ➡ 사도바울이 되었고, ➡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절반을 썼으며, ➡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결 론)

성령 충만한 얼굴에는 능력이 있다. 영적 권세가 있다.

(엡 5: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be filled with the Spirit;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의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

위를 바라본다. 주님을 바라본다.

이 땅의 것에 매이지 않고, 과거에 매이지 않는다.

성령 충만하면 원수가 없다손양원목사님처럼 용서의 사람이 된다.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천사의 얼굴처럼 보여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를 기록할 때 스데반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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