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일 금요일

세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자.


성경: 13:17-22, 고전 10:1-4
제목: 세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자.
 
오늘고난 주일이며, 세례식이 있는 날이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
(No Cross, No Crown)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
오늘은 세례와 연관하여서 돌아가서도 안 되고 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 대해서 말씀드리며
은혜 받고자 한.

(예화) 우리나라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산길을 가던 나그네가 함정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였다.
호랑이는 나그네를 보자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구슬프게 흐느끼며 간구하는 호랑이가 불쌍하여 꺼내 주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호랑이는 한숨을 돌리더니 나그네에게 뜻밖에 요구를 한다.
여러 날 동안 갇혀 있어서 너무나 시장하여 이제는 아사직전에 있게 되었으니 할 수 없이 나그네를 잡아먹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나그네는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재판을 한 번 받아 보자고 했다. 소에게 갔다.
호랑이가 말하기를 내가 배가 고파서 이 사람을 잡아먹어야 하겠다고 했다.
나그네는 억울하다고 했다. 가 판결하기를 사람이 나쁘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실컷 부려먹고 나서 끝내는 잡아먹기 까지 하지 않는가?"
나그네와 호랑이는 다시 소나무에게 물어 보았다. 소나무도 역시 호랑이를 편을 들었다.
"사람들은 우리 소나무를 때리고 꺾고 자기네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은 통째로 베어 버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쁘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땅바닥에 덜썩 주저 앉았는데,
때마침 토끼가 한 마리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둘은 마지막으로 토끼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야기를 한 참 듣고 있던 토끼가 말하기를,
"호랑아 이 사람이 너를 구해주기 전에는 어떤 처지에 있었지?" 물었다.
"하나 하나 재현을 실제적으로 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호랑이가 대답하기를 저기 구덩이가 있지! 하면서 들어가서 이렇게 들어가 있었어!
하면서 구덩이에 들어가서 토끼를 처다 보고 있었다.
마침내 토끼는 호랑이를 보고 판결을 내렸다.
"너는 거기서 고생 좀 하다가 죽어야 하겠다!"
 
이 민담은 우리에게 2가지 교훈을 준다.
하나는 은혜를 배신한 자, 은혜를 모르는 자는 자유도 누릴 권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다.
또 하나는 죽음의 자리에 또 다시 들어가는 호랑이의 어리석을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덩이 속의 죽음의 운명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니까,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또 들어간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셔서 광야를 돌아서 가나안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오늘 본문처럼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이유가 있다.
(13:17-18)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왜? 하나님께서 홍해 건너게 인도하셨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넘실거리는 홍해를 갈라서 물벽이 좌우로 생기게 하시고 바다사이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다. 그리고 곧 이어 뒤따라오던 애굽의 군대가 그 길로 들어
올 때 홍해 물 벽을 허물어서 바닷 속에 그들을 수장해 버린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이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가서도 안 된다.
그렇습니다. 애굽은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될 곳이다.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 신앙생활에 더욱 깊게 적용해 보십시다.
 
1)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세례를 의미한다. (고전10:1-2)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지난 사건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세례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고전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하여 굳이 홍해를 통과하게 하신 것은 애굽적인 것들을
다 죽게 만드신 것이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바로는 마귀를 상징한다.
애굽에 속해 있던 옛사람, 포로되었던 노예 근성, 물질적인 사고, 이방적인 생각, 우상을
섬겼던 것들, 그 모든 것을 다 홍해에 수장해 버리고 새 사람, 새 마음으로 가나안을 향해서 가게 하기 위하여 홍해를 통과시킨 것이다.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죄를 씻는다는 의미도 있고, 물 속에 잠긴다. 수장되었다.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하늘백성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늘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호랑이처럼 어리석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홍해바다를 건넌 존재들인 것이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 홍해 바다를 건넌 백성들이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이미 세례를 받았다.
결코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돔성이 멸망하게 될 때, 롯의 처가 뒤를 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화) 뉴질랜드 원주민 피지족이 있다.
동네 한 가운데 Killing Stone (죽음의 바위)가 있다. 우리나라 단두대와 같다.
죄 많은 죄인을 이 바위 위에 묶어 놓고, 머리를 짓눌러 죽인다. 얼마나 비참한가?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한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여 주여줌으로 죄에 대한 경고를
준다. 그런데 선교사가 여기 원주민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되면 세례를 이 Killing Stone
(죽음의 바위)에서 준다. 그것은 이 바위의 피를 보게 하고, , 옛 사람은 이렇게 죽었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가르쳐 준다고 한다. 이 선교 방법은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졌다.
그 문화권에 맞게 지혜롭게 대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능대체(Functional Substitute)라고 한다.
그래서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세례라고 설명한다.
 
(예화) 사람들은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 중요한 것은 은혜받기 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면 아무 쓸데가 없다.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다.
(벧후 2:22)
 
그렇다면 결코 돌아갈 수없는 애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2) 애급은 죄 많은 세상이고, 자유를 잃은 노예상태를 말한다.
애굽은 노예의 부자유함의 모습을 말한다. 죄로 인하여 포로 되고, 얽매임을 당하는 처지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자이지 죄에 속한 죄의 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죄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도둑질이나, 거짓말, 시기, 욕심, 살인... 이런 것들을 우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죄의 열매이지, 죄의 뿌리는 아니다.
진정한 죄의 뿌리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없이 지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큰 죄이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 같이 되리라
내가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 원죄로서 죄 중의 죄이다.
이 원죄로 인하여 죄의 열매, 자범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홍해 사건을 통해서 교육하고 있다.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이단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교주가 일어나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이다.
(문선명, 박태선, 박윤식....)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과 선의 열매를 맺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다 악한 열매만 맺는다.
이단들을 보면 전부가 다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한다. 자신이 구원자라고 떠든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고, 내가 구원자가 되고, 물질이 하나님이 되고, 나의 경험과 실력과 능력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가장 큰 죄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이다.
홍해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속하여 애굽의 종이 되어, 애굽을 위하여 일하며 살았다. 그러나 홍해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 가르쳐 준다.
너희들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을 향하여 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 바벨탑의 허구성과 죄성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탑을 쌓아서 홍수를 면해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언어를 흩으시는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죄의 포로 된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사건을 통하여 바닷물에 잠겨 시체가 된 애굽인과 다시 돌아갈 수없는 애굽 땅을 생각하면서,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여 오직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돌아갈 수없는 애굽은 바로 세상적인 옛 생활과 옛 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하나님 없는 사탄적인 세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과 모세는 다시 닫혀진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애굽의 모든 생활과는 영원히 분리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바다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여행길의 고달픔과 애굽에 두고 온 집과 이웃을 그리워하며 후회하는 연약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홍해바다가 다시 덮어짐으로 오직 가나안 땅으로 전진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부추와 마늘, 그리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하나님과 모세 원망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이것 때문에 광야에서 다 멸망 받았다.
신앙생활 승리는 이와 같이 옛 생활, 애급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다.
내 육신은 세상에 매력을 느끼며,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이미 죽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어거스틴, 지나가는데 창녀가 부른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거스틴은 죽었다고 말한다.
!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결코 돌아갈 수가 없다.

() 김익두 깡패 : 예수 믿은 후, 시장에서 물바가지 뒤집어 씀.
내가 예수 믿어 옛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당신 오늘 죽었소.

() 김유신 장군이 기생집에 --어머니가 스스로를 치는 것을 보고 결심을 함.
그러나 졸고 있는 사이에 말이 갔을 때, 말 목을 칼로 침
비록 명마를 잃었지만, 그는 명예로운 삶, 귀한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삶을 얻었습니다.
 
세상적인 욕망과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가책에 시달리고, 형벌의식에 매이게 됩니다.
때로는 교만과 때로는 절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소유나 물질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생을 양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욕에 매여 육체의 요구를 따라 썩어져 가는 불쌍한 심령이 되지 말아야 한다.
 
(결 론)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과 이미 세례를 받고 주님의 제자가 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세례를 받음으로 죄 씻음을 받음과 동시에 옛 사람도 함께 죽는 것이.
애굽은 세상의 상징이다. 애굽에서 나와 구원 받아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는 백성이다.
시 애굽으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노예가 아니고, 노예근성, 거지가 아니라 거지 근성, 막내끼, 세상끼, 무당끼 이런 것이 문제다이스라엘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홍해 바다를 건넜는데도 아직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가를 기억해야 할 것리다.
 
우리는 돌아갈 수없는 바다를 건넌 것이다. 돌아가서도 안 된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바다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
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어도,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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