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 씨리즈 (3)
성경 : 빌 1:12-19, 엡 4:2.
제목 : 사랑으로 서로 용납합시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렇게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면, 살수록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다 나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했다고 했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보아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되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인정해 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또 반대의 경우일 때도 있다.
상대방은 나에게 잘 해 주려고 했는데 내가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은 배려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적지 않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더불어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 첫 시간에는 사랑으로 인사합시다.
둘째 시간에는 사랑으로 복종합시다.
오늘은 사랑으로 용납합시다 란 주제로 말씀드리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문제는 사랑이다. 인간관계에서 최상의 비결은 사랑이다.
내가 사랑으로 대할 수만 있다면 인간관계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인사하라. (오늘 집사님을 뵈니 살맛이 납니다.)
사랑으로 복종하고, 오늘은 사랑으로 용납하자는 말씀입니다.
용납도 사랑이 있으면 용납이 되고, 사랑이 없으면 용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열쇠가 사랑으로 상대방을 용납하는 것이다.
1) 그러면 용납이 무엇인가?
용납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하는 차이점을 이해하고 받아 주는 것이다.
사람은 이름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듯이 기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혈액형(A, B, AB, 0형)이 다르다. 고향, 학력,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심지어 신앙적 배경도 다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다르니까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차이점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점을 고칠 점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고쳐 주려고 하다보니까 언성이 높아지고 다투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유형(DISC)이 4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성격유형검사 : MBTI)
주도형, 사교형, 안정형, 신중형. 일 중심적인 사람, 관계 중심적인 사람.
사람마다 관심과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이 다르다. (틀린 것이 아니고)
(예화) 청년회 수양회 오전 9시까지 모여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주도형 인간은: 일 중심이다. 그러니까 늦게 온 사람은 개인적으로 오라고 해...
사교형 사람은: 관계 중심이다. 그러니까 아이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무개가 꼭 온다고 했는데 빨리 전화해 볼께요.
그러면 누가 맞습니까? 둘 다 맞습니다. (사람 중심으로 살면 일이 잘 안 된다.
일 중심으로 살면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
누가 옳으냐?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사도바울은 일 중심적인 사람이고, 바나바는 관계 중심적인 사람이다. (마가를 놓고 싸웠다)
(예화) 음식도 떡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가?
마른 반찬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찌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가?
이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이다.
이 차이를 사랑으로 서로 용납할 수 있어야 인생이 행복하고 공동체가 행복해 진다.
심지어 때로는 잘못된 것이라도 단순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용납하면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다른 점을 용납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용납할 줄 모르면 더불어 살아가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누구 꼴 보기 싫어 교회도 떠나고, 그 공동체에 적응하기 어렵다.
심지어 부부가 (용납의 비결을 몰라서) 갈라서는 이유도 여기 있다.
만일 그런 문제로 이 공동체에서 떠나 다른 교회에 간다할 찌라도 똑같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회사도 한 직장에 오래 붙어있지를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으로 옮겨 다닐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용납의 방법을 터득해서 수용할 사람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행복한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나와 다른 상대방과의 차이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을 용납해야 하는가? (이유)
A) 우리는 하나님의 용납을 넘치도록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물과 잘못이 많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 주셨고, 용납해 주셨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도 내 과거의 잘못을 다 용서해 주셨고, 오늘의 잘못도 용서해 주시고,
미래의 잘못도 받아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셨듯이 나도 이웃을 용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나쁜 습관을 용납해 주셨다.
사소한 모든 잘못들을 용납해 주셨고, 삐뚤어진 습관도 받아주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도 서로 용납하며 살라는 것이다.
B) 내가 남을 용납할 때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또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행복도 달라진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보내기 위해서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동안은 시간이 낭비되고 있는 시간이다.
(예) 시간에는 4종류의 시간이 있다.
① 빼앗기는 시간 :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수군거리는 시간은 빼앗긴 시간이다.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모두 다 빼앗기는 시간이다.
② 죽이는 시간 : 술 취하고 방탕하고 놀음하며 보내는 시간은 다 죽이는 시간이다.
③ 진공적인 시간 : 잠만 자고, 멍청히 있는 시간, 무의미하게 보내는 흘려보내는 시간
④ 생산적인 시간 : 사랑하고 봉사하고 기뻐하는 시간. 기도하고 전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시간.
(예화) 누가 나를 험담하고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런 말을 전해 듣고 나면, 인간 본성적으로 (나도) 자연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를 미워하게 돼서 속이 끓고, 이를 갈고, 분통이 터지고,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그것은 시간을 빼앗기고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손해를 본 일, 억울한 일들이 생각과 모욕을 당했다던 일이 생각하니까 같이 미워하게 되고,
나도 같이 떠들게 되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면, 계속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다. 1시간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면 내 인생은 그 만큼 낭비한 것이고
불행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몸도 쇠약해지고, 당뇨 수치도 올라가고, 스트레스
쌓이고, 불면증, 혈압... 심리적 불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온다.
그러나 내가 사랑으로 덮어버리고 용서해 버리면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내 인생은 행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랑을 결단하고 용납하며 살아야 한다.
◉ 그러면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 (엡 4:2)에 있다.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라고 하셨다.
1) ( 겸손 )이다.
내가 겸손하면 용납이 된다. 겸손해야 용납할 수 있다.
용납한다는 말은 경청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누가 남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이다.
(예화) 영국 교회 알렉산더 닐 이란 개혁가가 있었다.
그는 섬머 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실험하면서 자녀 교육을 연구했다.
이 분의 연구가 있기 전까지 영국의 교육은 엄한 교육이었다. 처벌교육이다.
그런데 이 분의 연구 결과 “따뜻하고 수용적일 때 교육 효과가 더 높다는 것”을 연구 발표했다.
“다루기 어려운 아이는 불행한 아이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여자는 자신의 자녀나 남편을 괴롭히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이 살인하거나 도둑질
하거나 이웃을 괴롭히는 경우는 없다. 행복한 사람은 결코 아랫사람들을 들볶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고 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경청해 주면 이해도 하게 되고, 치료되기도 한다.
그런데, 겸손치 않으니 남의 말 들어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비판하고 배타적이 되고 관계가
더욱 나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용납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해야 한다.
2) ( 온유 )한 마음이다.
사람들이 온유를 유약한 것으로 오해한다.
온유란? 여전히 내 속에 힘이 있으나 그 힘을 올바른 목적과 방향으로 사용하는 힘이 온유이다
(예) 야생마는 힘이 넘친다. 그러나 그 힘이 통제가 안되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길들여지는 순간, 주인이 원하는 대로 그 힘이 다스려지고 유익하게 쓰임 받는다.
속에 있는 힘을 통제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고 강한 사람이다. 자기를 통제하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온유한 사람은 유약한 사람이 아니고 강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마5:5)고 하셨다.
우리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겸손과 함께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배려하고 보살펴 주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예화) 중국 명나라, 홍응명이 쓴 책 (채근담) :
남의 거짓을 깨달아도 말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모욕을 받아도 얼굴빛이 바뀌지 않고,
온유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 속에 무궁한 의미가 있고, 다함이 없는 효과가 있다.
용납하기 위해서는 온유한 태도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온유한 사람의 특징은 유머와 미소이다.
의사가 말하기를 ‘사람이 웃으면 미소근육이 저절로 움직이는데,
그 미소 근육은 대뇌를 움직여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다“ 고 한다.
실제로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일단 웃으면 여유도 생기고 머리도 좋아진다.
(예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어칠 경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그는 폭탄이 날아오는 참호 속을 뛰어다니면서 장교들에게 웃을 것과
웃게 만들 것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장교들이여 웃으시오. 또한 부하들을 웃게 만드시오.
웃지 못하겠거든 빙글거리기라도 하시오. 그것도 못하겠거든 구석에 가 있으시오” 라고 했다.
웃을 것, 웃게 만들 것을 명령했다. 웃어 봅시다. 웃음은 이 사회를 밝게 해주는 능력이다.
웃으면 큰 문제도 작은 문제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웃고 넘길 문제도 인상쓰면 다툼이 된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이 되면 웃으면서 상대방을 용납하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3) 오래 ( 참음 )으로 용납할 수 있다.
사람은 생각만큼 잘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는 더 잘 바뀌지 않는다.
또 바뀐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러한 문제는 자기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나 자신도 참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용납하기 위해서는 오래 오래 참는 인내심이 있어야 용납할 수 있다.
◉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내 할 수 있는 길은?
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사람이 한다면 변화가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
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나 자신이 얼마나 변화가 되지 않던가요? 나도 변화가 잘 안된다면 남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오래 오래 참으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4) ( 본질 )적인 것을 생각함으로 다른 작은 것들은 용납할 수 있다.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쓴 옥중서신이다.
감옥에 있으니, 복음을 더 이상 전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있다.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나요?
첫째) 그 동안 로마 황제 측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로마에 있는 친위대 감옥에 들어왔으니 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생겨서 기뻐하고
있다.
둘째) 바울이 감옥에 갇히니, 바울을 사랑하던 성도들이 열심을 내서 우리라도 힘써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뻐했다.
셋째는) 바울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울이 너무 훌륭해서 바울의 영향력 때문에 기를 피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이 날 뛰고 있다.
바울이 없으면 교회도 성장 못하고 교회도 안 될 것처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바울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뜨겁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너 없어도 잘 된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그가 출옥해도
발붙일 자리도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동기가 잘못된 것이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은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섭섭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를 대신 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니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한 것이다.
(빌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
하나니, (빌 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
으로 하나, (빌 1: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내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내 삶의 본질적 목표가 아닌가?
좋은 의도이든지, 나쁜 의도이든지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니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오직 복음 전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이다.
자기 자신은 어려운 처지에 있다할 찌라도, 투기와 분쟁으로 하든지, 착한 뜻으로 하든지....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도 바울은 이 상황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본질적인 사명에 감사하고 사소한 것은 무시하고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질적인 사명을 위해서라면 용납의 삶을 실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화) 한국 초대교회 김익두 목사님 (부흥사) : 전에는 깡패였다.
애기들이 울 때 호랑이 온다하지 않고 강패 김익두 온다고 하면 애기들 울음이 끄쳤다고 한다.
그가 은혜 받고 예수 믿어 후일에 부흥사가 되었다.
부흥회 인도차 산을 넘어 가는데, 산 정상에 올라가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왠 청년이 나타나서 야! 너 왜 나 보다 먼저 와 있어... 하고는 정신없이 패더래요.
다 때리셨습니까?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니가 다 받았다. 무슨 소린지 모른다.
당신 누구요? 내가 김익두다. 아이구! 형님 잘 못했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세요.
살고 싶으면 따라와. 그래서 부흥회 참석시키고 예수 믿게 했답니다.
복음 전도가 가장 중요하니, 매 맞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참고 용납했던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우리의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칼 힐티)
사명을 깨달으면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다.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다른 문제는 용납할 수 있는 것이다. 사명을 망각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중요하게 보여 지고, 자존심,
명예가 크게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사명의식이 부족해서 문제다.
(예) 어느 여집사님은 남편을 예수 믿게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니,
이 일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은 참고,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니까 오히려 전도가 안 되는 것이다.
(예화) 목사님 아들이 한 자매와 교제하다가 결혼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묻는다. 그 아이 예수 믿냐? 예. (키? 학벌? 외모...? 문제가 아니다.)
그럼 됐다. 그렇다면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해라.
우리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긴장 관계, 갈등관계가 있습니까?
복음보다 내 체면, 내 자존심, 내 명예, 내 위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용납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당신 뜻대로 합시다.
그러면 사소한 문제는 용납할 수 있게 된다.
(예화) 목사님의 넥타이 색깔이 중요한가? 머리 색깔이 중요한가? 파마하면 안 되나?
머리 쪼매면 안되나?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 사소한 일 때문에 공연히 다투다가 불편해 지고, 공동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명에 충실하도록 사명에 눈을 떠야 한다.
본질에 충실하고 비본질적인 것은 넘어가야 한다.
(결 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성격, 기질, 배경, 신앙 칼라...모든 면에서 다르고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우리의 본질적 사명을 깨닫고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용납하면
가정도 교회도 행복한 생명나무 공동체가 될 것이다. (기 도)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