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5일 금요일

(4)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 씨리즈 (4)
 
성경 : 마태복음 6:9-15
제목 :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와 행복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서 몇 주 동안 배우고 있다.
사람은 혼자 살기가 어렵다. 창조 때부터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들어 졌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다보면, 당연히 부닥치기도 하고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고 부닥치다보면 혼자 살고 싶은 생각도 들것이다.
그러나, 혼자 살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 죄수들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감옥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면 독방에 가두어 둔다.
그러면, 외롭고 고독해서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정신이 미쳐버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더불어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혼자 살면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랑으로 서로 인사합시다. 사랑으로 서로 복종합시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합시. 오늘은 사랑으로 서로 용서합시다. 
4가지 중에서 오늘 말씀이 실천하기 제일 어렵다.
 
용납이란? 서로 다른 차이점을 틀리다고 지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고 배웠. 사소한 것은 그냥 지나가고 용납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인간관계 속에서 겪는 갈등과 문제들의 대부분은 사소한 문제들이다.
사소한 것을 크게 확대시키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삶이 살기가 힘들고 각박해 지고 어려워지는 것이다.
 
(예화) 어떤 부부가 살다가 결국은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이혼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물어보았더니, 남편이 아내에게 창문 좀 열라고 했더니 당신은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하고 당신이 직접 열라고 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화) 치약 짤 때, 위부터, 아래부터
(예화) 옷 걸이 방향 때문에 싸운다.
보통 싸움의 시작은 사소한 일로 시작한다.
그럴 때 용납이 필요한 것이다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용납과 용서는 어떻게 다른가?
용납은 사소한 문제, 개성의 차이... 등등을 Accept하고 받아 주는 것이고,
(차이점을 틀렸다고 지적하지 말고)
용서는 객관적으로 누가 보아도 잘못된 큰 문제, 죄 지은 것을 덮어주는 것이다.
죄 지은 것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나는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 누가 나에 대하여 계속 비방하고 다닌다면 용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재정적으로 크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간 사람.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예화) 군인 대령 출신 : 전역 함, 퇴직금 꼬셔서, 사기치고 달아남.
 
(예화) 어떤 교회 중직자 : 새 교우들에게 그렇게 잘 했답니다.
그리고 돈 벌게 해 주겠다고 해서 돈을 많이 거두고 도망쳤더랍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잘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살면 뭐가 행복할까?
 
(예화) 이런 경우도 있다. 어떤 유학생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아내는 고생 고생하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는 가운데 남편은 점점 멋있어가고, 아내는 점점 초라해 졌습니다.
어느 날 이 남편은 학위를 받았는데, 아내의 뒷바라지로 성공한 남편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산다면 이 여자 입장에서 그 남편을 어떻게 용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 용서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영화에 나온 이야기)
본인은 물론 그 여자의 부모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용서는 누구에게나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결코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용서가 쉽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화) 시카고에 사는 어떤 청년은 강도에 의하여 자기 아버지가 살해 당했다.
그 때 그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신문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 살인강도라도 용서하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으로선 용서가 안 되네요. 앞으로도 영원히 용서 못할 겁니다.
여러분! 용서 못하겠다고 하는 이 청년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용서하기가 어려운가?
용서하려면 댓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그 나쁜 원수 같은 놈을 응징하고 복수해야 속이 시원하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나에게 손해를 입힌 그대로 너도 당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이 정도가 아니다. 내 이빨 하나 뿌려 뜨렸으면,
너는 3-4개 뿌려 뜨려야 속이 시원한 것이다.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용서란? 나에게 죄 지은 사람에 대하여 복수할 권리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것이 용서다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대이빗 헛스보그 “Freedom of forgiveness" 책에서
용서 해 주는 사람은 즉, 자기가 이미 손해 본 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용서는 계속적이때문에 동일한 댓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용서란 아무 비판도 없이 아무 
비평도 없이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고 말했다.
 
복수하고 응징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인데, 그러면:
나님이 내 마음을 알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때에 복수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속상하다.
하나님의 시계는 천천히 돌아간다. 내 마음은 그 나쁜 놈 같으니... 10리도 못 가서 발병나라.
! 그런데 발병은 고사하고 벤츠타고 다닌다니까요!
날 버리고 새 살림을 차린 그 나쁜 인간이 지독한 여자를 만나서 고생, 고생을 해야 하는데,
고생은 무슨 고생? 새 여자와 잘 먹고 잘 살 거든요!
내 돈 떼먹고 사기 친 그 인간이 내 돈을 사업 밑천 삼아서 잘 살고 있거든요!
그런 소문을 듣거나 그런 인간을 만나게 될 때, 아이고, 속상해라. 원통하고 억울해서 잠 못
이루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
저와 여러분이 용서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만일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그 아픔의 대가보다 더 크고
무서운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예화) 루이스 스미드즈 란 분은 용서하고 잊어버리자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사람이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복수의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했다.
 
그러면, 복수는 무엇인가? 평등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나에게 해를 끼쳤으면, 당연히 너도 그 만큼은 당해야 한다는 평등심리가 복수심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복수심은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받은 사람을 함께 묶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태우고
멈출 줄을 모른다. 그들을 함께 묶어서 양쪽이 어느 누구도 내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고통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마침내 다같이 망할 때까지 가게 한다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심장 박동이 급해지고, 불면증, 소화 장애,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에 시달린다. 내가 용서하지 않을 때 제명에 못산다. 한 맺힌 인생은 자멸되고 만다.
 
2) 둘째로,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이유 외에도 용서해야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이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독일 신학자 F.B. Myer 는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공급받아야 할 것 두 가지는 :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은총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용서 못해요.”
이런 사람은 이 기도를 어떻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입을 가리우고 기도를 멈추었다고 합니다. 양심에 걸리고 부끄러워서 차마 이 기도를 못했답니다.
여기 (12)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후반부 기도 내용은 너무나 은혜스러운 기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처럼, 용서해 준 것만큼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말을 거꾸로 말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내 죄도 용서해 주지 마소서. 주여! 내가 그 놈의 죄를 용서 못하겠으니 내 죄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런 기도가 된다.
얼마나 무서운 기도가 되는가?
 
그러면, 여기서 잠깐 교리적으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죄를 용서해 줄 때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말인가?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조건적이다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은 이미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해 주심에 대한 강한 확신을 나타내는 신앙고백이 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5:44)
우리의 죄는 우리의 어떤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해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사죄함을 받고 아들이 되었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의 죄를 값없이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뜻이다.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이 기도는
주여 날 용서해 주소서.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용서 안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오려면 남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남을 용서해야 한다.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2-3사람은 누구인가? 그 앞의 몇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손해를 준 사람과 손해를 끼친 사람이 화해하고 용서하여 내 이름으로 손을 잡고 합심해서 기도하면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
1) 용서의 대상 :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준 것같이 ... 할 때 : 그 놈만 빼놓고...
사실 우리가 일생동안 용서해야 할 대상은 요 손가락 안에 다 들어있는 몇 사람이다.
 
(예화) 북한에도 교회가 있는데, 공산당원이 뒤를 봐주는 가정교회가 있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셨지만, 
미제국주의는 빼놓고 사랑합세다래.
 
(예화) 유대인들도 네 이웃을 유대인이지 이방인은 아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내 마음 속에 걸리는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을 용서할 때 진짜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2) 용서의 조건 :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할 때만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한다.
남편이 무릎 꿇고 죄를 고백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너무 너무 어렵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으시대고 다니니 어떻게 용서가 됩니까?
 
(예화) 왜 예수님이 그렇게 위대하신가? 용서 때문이다.
예수님은 평생, 용서의 삶을 사셨고 마지막 순간에도 원수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해 주셨다.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 벤허 영화에서 : 벤허가 복수의 칼을 버린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하나님께 드린 이 기도를 듣는 순간 모든 복수의 감정이 사라지고 새 사람이 되었다.
 
(예화) 손양원 목사님(1902년 생) 1948년 여수춘천 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 동신이가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그때 목사님의 나이는 46세였다. 이 살해자 원수를 위해서 탄원서를 제출해서 석방시켜 주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자기 양자로 삼았다. 정말 사랑의 원자탄이다.
이 사건 과정에서 그 살인자가 잘못했으니 날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 아니나,
손 목사님은 용서해 주었다. 용서는 위대한 능력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 지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예화) 이재철 목사님 : 
제네바에서 백인들이 인종차별하면서, 자기 차 앞에 쓰레기도 버리고,
담배 재도 버리고... 인사해도 받지 않았답니다.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그래도 내가 크리스챤인데. 내가 같이 화내면 더불어 살 수 없지... 하면서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참았답니다.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니 인사하는 관계가 되고, 1년 반이 지나니 대화하는 관계가 되었3년이 지났을 때는 좋은 이웃관계가 되었답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잘못했다고 말을 안 해도 나는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럴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용서의 비결 :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깨달을수록 용서할 수 있다.
누가복음 7: 죄인 된 여자가 향유를 붓는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 뒤로 가만히 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씻어드리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이것을 지켜보던 바리새인이 화를 내니까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다.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사람은 용서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큰 용서를 이미 받았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예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있다. 1만 달란트는 60,000,000(6천만)데나리온이다.
그 당시 유대 나라가 로마에 바치는 조공이 800달란트였으니, 12년 반년 동안의 조공세이다.
또한, 그 당신 노동자 1일 품삯이 1데나리온이다. 60,000,000날 동안 벌어야 하는 거액이다.
햇수로 계산하면 164,383(164)년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이다.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탕감해 주었다는 말이다.
 
성도 여러분!
당신은 누구를 용서 해 보셨습니까? 이 질문 대신에 당신은 용서를 받아 보셨습니까?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자인가를 먼저 생각하면 나도 용서가 가능해 지기 시작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나요?
내가 받은 용서에 대한 감격이 둔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용서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이를 악물고 용서해야지 한다고 용서가 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결 론)
용서는 아름답고 위대한 일이다. 성경은 용서의 책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니,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고, 용서의 삶을 살 때 가정도, 교회 공동체도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용서를 선포하라.
용서의 신학 3F : Forgive, Forever, Forget. (용서하고, 영원히, 잊어버리자)
Forgive Forget 는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예화) 이제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용서하기 힘들었던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대인 싸이먼 뤼젠탈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죽음의 사선(死線)을 수 없이 넘긴 사람이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 동족이 수 없이 죽어 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는 전쟁 후에 나치를 고발하는 책을 썼다.
그가 감옥에 있던 어느 날, 독일 간수 하나가 자기를 데리고
어떤 병원 지하 골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골방에 독일 남자 하나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 독일 사람은 자기가 유대인을 수 없이 죽였다고 고백한다.
그 때 죽어가는 이 독일 남자가 뤼젠탈이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 들려준다.
큰 방에 수백명의 유대인을 집어넣고 불질러 타 죽였다고 한다.
그 때 그 방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을 무차별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런데, 그 때 한 어린 소년이 불구덩이에서 뛰쳐나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데,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사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내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끔찍한 죄인지를 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나의 요구가 무리한 요구인지를 압니다만,
나를 용서한다고 한마디만 해 준다면 나는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말한다.
이 때 뤼젠탈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
물론 그 독일 남자는 용서의 말을 듣지 못하고 죽었다.
 
뤼젠탈은 2차 대전 후에 건축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있었으나, 다 버리고, 한 가지 일
에 몰두한다. 나치 색출 담당 작업에 앞장서서 도망간 모든 나치를 잡아 감옥에 집어넣거나
처형시키는 일을 한다.
그런데 1977년에 이 싸이먼 뤼젠탈이 웨스트 L.A.박물관을 세운다.
그 박물관의 이름을 용서(관용)의 박물관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뉴욕에도, 토론토에도, 마이아미에도, 예루살렘에도 계속 세워나갔다.
그 박물관 안에는 나치가 어떻게 유대인을 인종차별하고 고문하며 죽였는지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증오는 증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용서는 용서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용서가 너무 힘들다. 목사님 암만 그렇게 설교를 해도 난 그 인간 절대로 용서 못해요.”
저도 그 마음 이해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증오는 증오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지만, 용서는 용서를 가져온다용서를 해야 비로소 나에게 자유와 평안이 주어진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서만 아니라, 나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해야만 합니다.
또한 나의 평안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결단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경험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 도)
 
(기도) 이 시간 다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잘못과 죄를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이 시간 그를 용서하고 자유 하게 하옵소서.
나에게 행했던 모든 잘못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품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며, 이 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내가 이미 용서의 은총을 받았기에 나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주소서.
주님이 주시는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고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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