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1일 월요일

◉ 당신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성경 : 누가복음 23: 39-43
제목 : 당신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 설교는 이동원목사님의 설교임을 밝혀 둔다)
(너무  은혜가 되어서  함께 은혜 받으시기를 바래서 올린다)
 
(예화) 1492 스페인령으로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던 저 유명한 지브랄탈 해역에는 라틴어의 
세 글자로 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있었다고 합니다
네어 불루스 울트라 (= No More beyond)
이 넘어 에는 아무것도 없다. 유럽인과 스페인 사람들은 바로 이 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다. 지구는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돌아왔다. 저 건너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지구의 끝,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지구의 끝을 넘어서서 미지의 신대륙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표지판은 바뀌었습니다. 네어가 영어로 “No” 이다. “No”가 빠지니까, 이제는 More beyond 저 건너편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놀라운 것이 있다. 이렇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한다. 죽으면 끝이다. 죽음 앞에 서서 우리는 끝났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혹시 More beyond 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현상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연구한 하바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 라는 학자가 있다. Near death experience 란 책에서 의학적으로 죽음이 판정되었던 사람들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케이스들을 모아 놓았다. 그들은 죽음에서 다시 깨어나서 말하는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 있다.
하나는 어떤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과 악몽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터널을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빛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너무 너무 행복했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의 말이 성경은 아니다. 참고할 만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
천국은 둘 중의 하나이다. 있거나 없거나 챤스는 반반이다.
그런데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는 수학자이니까 계산했겠죠?
천국은 없다 할 찌라도, 천국을 믿고 살았던 나에게는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래서 준비만 했었다면 갈 수 있었던 천국인데, 내가 그 천국을 놓쳐버렸다면 큰일이다. 이것을 놓쳐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고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어떻게 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 바로 직전에,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장받고 그러니까, 죽음 이후에 천국이라는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개한 강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양쪽에 달린 두 강도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다 강도요, 행악자였다.
그런데 한 강도는 여전히 죽어가면서도 저주하고 욕을 하며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그 사람을 향하여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0-41)
그리고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 때 예수님과 똑같은 고통과 신음 속에서 그러나, 그 곁에서 이렇게 고백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서, 천국에서 깨어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극적인 구원의 사건입니까?
 
(예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미국 목사님이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이 강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생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강도처럼 예수 믿고 천국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파도 자존심이 있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하하)
그래서 이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까? 선생님 자신만을 위해 사셨습니까?
아 저야 하나님을 모르니까 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겠죠. 이 분이 마침 은행계통에서 일하던 분이였다고 합니다. 그럼 선생님 은행지점장도 많이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뉴욕은행의 지점장으로 파견되었는데 본부는 따로 있고 거기 지점장으로 파견되었는데 지점장으로서 본부나 상부 지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은행을 소유한 사주의 견해와 상관이 없이 마음대로 돈을 쓰시고 그리고 본점에 하나도 보내지 않고 다 쓰셨으면 그런 사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강도겠네요.
선생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았다면 그게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가만히 계시더래요.
 
(예화)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죽어가면서 갑자기 자기 식구들을 보고 변호사와 의사를 불러오라고 하더래요.
아니 아버님 왜 갑자기 변호사와 의사에요? 나도 예수처럼 죽고 싶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 그러니까 하시는 말씀이 나도 두 강도 사이에서 죽고 싶다. (하하) (변호사 의사계시면 참 죄송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의료보험 많이 빼앗기고, 재판하다보면 법률가들에게 주는 돈이 많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강도지요. 자기 이기심의 만족을 위해서, 내가 작은 이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만이 강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강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과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습니다. Good News를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강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냥 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했길래 천국에 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그의 마지막 신앙고백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지막 신앙고백 때문에. 그 말을 또 다른 말로하면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다.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이 말도 쉽지는 않습니다.
 
이 강도는 삼위일체 교리를 안 것도 아니다. 중생이라는 말도 모른다.
조직신학을 아는 것도 아니다. 교회 직분을 받은 것도 아니다. 직분은 없어도 상관없다.
교리나 신학을 몰라도 상관없이,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천국을 보장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이유는 :
1) 첫째: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0-41)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것이 마땅하다.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고 아마도 생명에도 해를 끼쳤을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받는 사형 집행은 나의 죄값이다.
이 사람에게는 분명한 죄의식, 죄책이 있었다. 그리고 죄를 인정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렇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여기 서서 설교하는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의인이 있지 않느냐? 고 말합니다. 영웅을 말합니다. 위인을 말합니다. 성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시각이고 사람의 견해이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우리의 심장을 꿰뚫어 보시고 겉으로 표출된 내 행동의 배후에 있는 삶의 동기를 살피시며, 가장 은밀한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었던 내 삶의 모든 모습을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예화) 오래 전에 영국에서 장난치기 좋아하던 청년하나가 장난을 쳤습니다. 런던의 가장 유명한 사회적 저명 인사 40명의 명단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똑같은 전문을 보냈습니다.
전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났으니, 피신하기 바람.”
그 다음날 40명이 다 없어졌답니다.(하하)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죄인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듯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17)
이 말씀은 나는 영혼의 의사다. 나는 병자를 위해서 왔노라.
 
여러분 !
병자의 치유 희망,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은 무엇입 니까? 1 단계는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의사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 제 몸이 아파요. 어깨도 쑤시고, 허리도 아프고, 기력도 없고, 입맛도 없어요.
이러한 고백은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건강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어느 날, 내 인생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용서받은 자로 하나님 나라, 천국의 소망을 갖기 원하십니까?
1) 첫째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 강도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처형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해. 당연하지. 좀 더 원색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죽는 것이 싸! 강도질하고 살아왔던 인생, 나를 위해서만 살아왔던 내 인생은 이렇게 죽어도 마땅하지
나는 죄인이야. 우리는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2) 둘째는 나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둘째 단계이다.
40절을 보세요. 다시 한번 이 회개한 강도의 부르짖음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이 강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두려움, 이것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이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죄를 범할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신다.
내가 한 말도 심판하고, 내 행동도 심판하고, 내 생각도 심판한다. 어느 날, 내가 창조주이시오.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일생이 낱낱이 심판된다는 이것을 믿는다면 여러분 참으로 죄를 범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함이 없기 때문에 쉽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7-9)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나를 보시고 아시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내 인생을 지어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죄를 범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생각이 나를 사로잡습니까?
아무도 안보는 데, 아무도 보지 않는데 뭐...
아닙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꿰뚫어 보시고 내 깊은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며 내 생각의 동기를 아시고, 살피시는 그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어떻게 주님 앞에 설 것인가?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이다. 성경은 이것을 경외라고 한다.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이다.
이것을 성경은 진지한 회개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
이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내 어떤 공적을 가지고서도 내가 좀 착한 일을 한 것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자기의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 번째 밖에 없다.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처럼 해야 할 세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매달려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
아니? 언제 예수님이 나라를 가지고 계셨나?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고 핍박을 받았던 젊은이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 강도는 예수님이 나라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심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보통 교회에서 흔히 말하기를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두 번째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말씀하시기 전에 첫 번째 말씀이 있었습니다. 34절입니다.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예화) Passion of the Christ (영화)를 보면서 ... 마지막 부분에서 용서의 기도 장면.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그 말을 들은 옆의 강도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 분은 남을 용서하고 있다.
여러분 !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이 극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의학자들이 말하는데 다른 생각을 아무것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저 아프다. 그것 밖에는 생각을 못하고 고통스럽다는 것뿐이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의 극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옆에 있는 강도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아니 저분이 누구신가? 저 분이 정말 세간에 들리는 것처럼 메시야이신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계신 분,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분,
그렇다면 저 분이 나를 용서해 주신다면, 지금 저들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저 분이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나도 용서받고, 저 천국, 그 분의 나라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께 매어 달립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를 위해서 매달립니다.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 강도는 조금 전에 예수님의 선포하시는 음성을 들은 것이다. 이 격렬한 고통과 저주와 야유와 조롱을 받고도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기보다는 원수와 이웃을 생각하며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저 분은 메시아이시다. 약속 된 메시야,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이시는 바로 그 분이시다.
그렇다면 내가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소망, 마지막 잎새 같은 최후의 소망을 예수님께 걸고, 자신과 같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지만, 자기와는 전혀 다른 그 분을 향해서 외칩니다. 예수여! 저를 구원하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천국은 낙원입니다. 파라다이스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라다이스를 말했다.
이상향을 말하고 유토피아를 말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가져 보지 못했다. 본래 유토피아란 말의 뜻은 노 프레이즈 그런 곳은 없다는 뜻이다.
유토피아 그런 곳은 이 세상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가 꿈꾸고 그리던 이상향, 우리의 꿈과 기쁨,
우리 삶의 모든 소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 진정한 파라다이스, 천국은 낙원입니다.
그 천국은 우리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입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내게 꿈을 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고, 노래를 주시고 찬양을 주시는 그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강도는 자기가 죽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생명이 잠시 후에 끝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일까요?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이처럼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니..? 그것은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할렐루야)
그렇다. 나는 잠시 후에 저 분의 낙원에, 저 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강도에게는 후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저 분을 좀 더 일찍 만나서 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나는 강도가 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인생을 헛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내가 저 분을 만난 것. 그리고 저 분의 보장을 받은 것, 저 분이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감사입니까? 감격입니까?
이제 이 강도의 심장이 멎는 순간, 그의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순간, 그 사람 앞에는 낙원으로 가는, 천국의 길이 환하게 열려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but by me.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분, 그 분을 통해서 용서받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 아무도 자기의 의로, 자기의 공로로, 자기의 크레딧으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는 없지만, 예수 믿고 용서받아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화)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 밀림 정글에서 마을을 찾아다니다가 길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프리카 정글 지대에 살고 있는 토인 하나를 길잡이로 돈을 주고 고용했습니다.
내가 어느 마을로 가기를 원하는데 데려다 달라고 했다. 이 청년이 나를 따라 오세요.”
그래서 따라 나섰는데 전혀 길 같지 않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마을이 나올까?
그래서 미심 적어 선교사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청년 정말 길을 아시오?” 이때 토인 청년이 빙그레 웃으면서 선교사를 바라보며, 말하는데 이 선교사가 평생 잊지 못할 대답을 하더래요.
선교사님. 제가 길입니다. I am the way 내가 곧 길이에요.
예수님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 그 죄 많은 인생, 그 허물 많은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천국을 보장받고 마지막 순간에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이 강도,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어떻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요? 어떻게 이런 은혜가 임했나요?
 
1) 첫째로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했으므로,
2)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3)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저를 구원해 주세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세요. 부르짖었다.
 
이 때 주님은 이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그의 심장이 멎는 순간 이 밝은 길을 통해서 주님의 품안에 안기는 순간 죄송해요. 주님 저는 평생을 잘못 살았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이제는 다 잊어버려라.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여기 있는 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이 강도에게 임한 구원의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기 도)
 
다같이 머리 숙여 기도합시다.
우리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 축복의 기도를 드립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 해 주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시고, 오늘 결심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축복해 주소서. 안아주시고, 받아주시고, 저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십자가의 강도를 구원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백성이 되자고 부르십니다. 하나님 이 천국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기쁘고 아름다운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도와주소서.
성경 읽고 기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제하며 멋지고 아름다운 풍성한 인생을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이제는 다 주님께 맡기고 살게 하소서.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외로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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