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높이라. (렘 1:4-10, 요 1:12.)
(하나님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자아상(自我像)이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정체성, identity>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부정적 자아상과 긍정적인 자아상이 있다.
이런 자아상은 그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아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긍정적인 자아상이다.
문제는 자아상은 자신의 생각이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과 다른 사람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만들어 지기도 한다.
(예) 메뚜기 콤플렉스(민 13:33). 부모의 영향력이 매우 중요하다.
(1) 부정적인 자아상 (6절) :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병중의 하나가 우울증(Melancholia)이라는 병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삶의 의욕이 없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
우울증 환자의 2/3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14%는 자살을 시도한다.
집중력이나 기억력이 저하되고 목소리가 작아지고, 말수가 줄어든다.
우울증을 가리켜 마음의 감기라고도 불릴 정도로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심리적인 병이다
(예화) ‘안델 셈’이라는 작가가 쓴 “미운 오리 새끼”라는 이야기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못 생긴 오리 새끼가 태어났다. 이 오리 새끼는 자라면서 점점 더 못생겨졌다.
언니 오리들이 따돌립니다. 동생 오리들에게서도 왕 따 당한다.
친구 오리들도 외면합니다.
“넌 뭐야?, 못 생긴 것 같으니... 고양이에게 물려 죽어라. 먼 곳으로 가 버려라.”
이웃집의 닭들도 이 미운 오리새끼를 왕 따 시킨다.
심지어 자기를 낳은 엄마도 자기를 따돌린다.
‘내가 어쩌다 저렇게 생긴 내 새끼를 낳았지?’
이 못생긴 오리와 상대해 주는 이웃이 아무도 없다.
못생긴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못 생겼다.
결국 이 오리는 우울증에 걸렸고, 심한 열등감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미운 오리새끼는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새들이 하늘에서 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한번 날개를 힘껏 펼치고 창공을 날개 된다.
이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백조(Swan)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자기도 놀라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스스로 신통하게 생각해 본적도 없고, 다른 사람도 나를 기대하지도 않는 아픔을
경험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나는 왜 이것 밖에 못 되지?
자기도, 남들도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이런 자기 비하, 자기 열등감, 자기 자학 행위는 인생에 큰 불행을 가져다준다.
자기 비하는 인간 성숙의 방해 요소이다. 내일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지게 합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좋은 동반자가 아니다.
나를 가장 못살게 구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이런 사람을 자학자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의 친구요,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를 자책한 나머지 칼로 자학 행위도 한다.
자기의 머리를 벽에 쳐 박기도 한다.
사람은 자기의 <신분>에 따라 행동한다.
자기 스스로를 쓰레기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고상하게 살 수 있는가?
자기의 자존감을 높이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자학행위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자기를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새로운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참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Identity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3이 있다.
① 남이 보는 나
② 내가 보는 나
③ 하나님이 보는 나 (너는 귀한 존재이다.)
어느 것이 중요한가? 자기를 긍정하느냐? 자기를 부정하느냐?
자기 정체성이 부정적으로 인식이 되어서 자기 비하라는 열등감과 우울증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나도 내가 싫다. 자기 비하는 결코 겸손이 아니다.
겸손과 자기 비하는 다른 것이다.
"자기 비하" 라는 열등감은 자기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른 것이다.)
자존심은 겸손히 내려놓고, 자존감은 높여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나도 나를 기대하지 않는데, 누가 나에 대하여 기대해 주겠습니까?
자기 비하, 자기 자학적인 인생은 자기 스스로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고, 모든 인간관계를 깨뜨린다.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것은 사탄의 무기이며, 사탄의 술수이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전략을 세운다. 그 사람의 가장 약한 점을 공격한다.
자기 열등감, 자기 비하의식, 바로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게 만든다.
우울증과 열등감은 의학적인 병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인생을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도록 만드는 사탄의 무기이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가끔은 이런 우울증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한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 마귀의 심리적, 영적인 무기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비교의식, 열등감을 이용한다. 나는 필요 없는 존재이다.
이런 사람에게 소망과 미래가 열릴 까요?
(예화) 박노애 시인 “그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책에서 이런 글을 썼다.
희망에 가득 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해결자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행복자이다.
스스로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 속에 희망이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한다.
그렇습니다.
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 자학적인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절대 없다.
인생을 성공하고 희망차게 살고, 소망의 사람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자아 발견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호칭과 변화된 신분을 약속하고 말씀해 주셨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계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상의 말씀들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아야 할 말씀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말씀을 붙들고, 의식이 달라지는 인식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자신의 변화된 신분을 모른 채, 죄책에 포로가 되어 있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통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굉장히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숨겨진 내면적 갈등으로 고통당하는 신자가 많다.
기쁨과 자유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를 “미운 오리새끼의 의식” 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것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몰라서 그렇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게 된 것을 아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노라” 고 하는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변화의 감격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러나 예레미야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별거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의식의 수로에 묶여 있었다.
(렘 1:6)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2) 새롭게 재발견 된 긍정적인 자아상. (7-10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하여 새롭게 선포하며 인정해 주셨다.
(7절)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정해진 긍정적인 자아상이 생겼다.
(예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리 바다에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가능성을 보시고 새 이름을 주신다.
<게바>라.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신다. 너는 장차 하나님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니라.
어부를 불러 하나님 나라의 수제자로 세우시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영혼 속에 있는 보화를 끄집어 내 주신다. 너는 놀라운 존재다.
너는 하나님의 큰 사업을 맡게 될 것이다.
(예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
모세는 :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말도 잘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 걱정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미운 오리 새끼의 의식을 갖고 그냥 그렇게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늘의 영광스러운 백조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존재로 살아가시겠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멋지게 살아보지 않으시렵니까?
(예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는 집이 못 마땅하게 여겨져서 집을 팔려고 집을 내 놓았다.
그래서 부동산 업자를 불러서 자기 집의 장점을 조사시키고, 팔고 싶었던 집의 장점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난 자기 집 광고를 보고, 다시 부동산 업자를
만나서 집을 안 팔겠다고 했다.
이유는 “내 집이 이렇게 훌륭한 집인 줄을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노라”고 했다.
내가 살고 있으면서도 내 집이 이렇게 훌륭한 집에서 사는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여러분 !
지금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아직도 여러분은 내가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하며 살진 않습니까?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내 안에 얼마나 큰 보배가 있으며?
내가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내가 얼마나 주 안에서 가능성이 있는 존재인지를 아십니까? (빌 4:13)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치와 보배를 모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열등감 속에서 우울하게 세월을 낭비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불행은 비교의식에서 시작됩니다. 사울 왕이 그래서 망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잔디가 더 파래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좋아 보이고, 그런 것을 따라 가는 자가 아닌가요?
나에게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삶의 내용과 축복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한숨만 쉬고 살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천국의 왕자요, 공주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만든 자학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 만든 상처에서 고통받고 있지 않나요?
(3)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의 깨달음은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된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가장 큰 보화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은 얼마나 놀라운 이름입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라니 얼마나 큰 보배로운 호칭입니까?
(예화) 여러분에게 자녀들이 있습니까? 자녀를 키우고 계십니까?
자녀들이 언제 큰 자부심이 생기나요?
엄마 아빠는 “나는 네가 내 아들(딸)이라는 것만으로도 기쁨이고 행복이란다”
이 말 한 마디가 용기 있게 해주고 인생을 살맛나게 해 주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 딸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라 부르지 말고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라.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신비이며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까?
(시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전능하시고 사랑 많으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나 스스로를 비하시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당해도 그 무엇으로도 단절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결 론)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고 믿고 느껴질 때 자존감이 생기고, 귀한 존재로 살게 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와 그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영광스럽게 사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영광이 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귀한 존재이다.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도 말고, 자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주셨다.
이 권세를 누리면서 기쁘고 영광스럽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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