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8일 금요일

인간관계의 승리 (므비보셋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삼하 9:1-8)

        인간관계의 승리 (삼하 9:1-8)

(므비보셋을 사랑할 수 있는가?)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신앙 생활은 곧, 관계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마 22:37-40)

인생이 무엇이냐? 할 때 인생은 곧 관계이다.

관계에서 실패한 사람은 인생을 실패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의 성공은 곧 인생의 승리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아무 관계도 없이 홀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형제, 친척과 이웃의 관계를 맺고 태어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또 살면서 계속 관계를 맺어 가며 산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 관계가 모두 사랑의 관계라면

좋겠는데 어떤 때는 미움의 관계도 있다.

(예) 어머니의 10년 기도 속에서 태어난 아기는 사랑을 많이 받으나 태어날 때부터

원치 않는 아기는 미움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관계에는 사랑의 관계도 있고, 미움의 관계도 있다.

또는, 제 3의 관계무관심의 관계도 있다.

사람이 한 사람을 알고 서로 관계를 맺고 나서,

끝까지 사랑의 관계로 끝나는 인간관계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예화) * 괴로우나 즐거우나 사랑하겠노라고 하면서 100년 계약을 맺은 신혼부부가

몇 년을 못 지내고 헤어지기도 한다.

* 제자가 스승을 팔고 스승이 제자를 이용하는 비윤리적 관계로 끝나는 사제지간도 있다.

* 혹은 모시고 있는 목사를 배척하고 목사와 교인이, 교인과 교인끼리 싸운다는 듣기

거북한 관계도 이 세상에는 있다.

* 이민 사회를 보면 처음 사랑의 관계가 섭섭한 관계로 끝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인간은 한번 맺은 사랑의 관계가 자꾸 변한다.

자짓하면 평생 애인평생 원수로 돌변하기도 한다.

인간이 맘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우리가 평생 생각해야 할 숙제는 인간관계이다.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바라기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 서로 서로 덕스러운 인간관계,

신의가 있는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요난단이 맺은 의리와 사랑으로 뭉쳐진 인간관계를 갖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5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다윗, 사울, 요나단, 므비보셋, 시바) 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으로 멋진 인간관계를 이루는 다윗의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사 울

다 윗

국가적으로

신하

가정적으로

장인

사위

개인적으로

목동을 왕의 사위로

삼아 준 은인

평생을 따라다니며

죽이려 했던 원수

먼저 우리는 사울다윗의 인간관계를 알아야 한다.

한편 그의 아들 요나단은 목숨 걸고 다윗을 사랑했다.

(삼상 20:17)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고 했다.

사울왕은 자기를 죽이려했던 원수요, 그의 아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다.

사울왕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다. 그러나 인간 이하의 사람이다.

사울왕은 장인도 되지만, 나를 죽이려는 가해자요, 살인 미수범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관계 속에 있는 다윗은 사울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또, 그 후손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이 사울에 대한 인간관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동시적 관계라고 부른다.

본문에는 므비보셋이 나온다

그는 원수의 마지막 씨앗이면서, 친구 요나단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런 동시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므비보셋을 대했는가?

여기서 인간은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당신이 다윗이라면 므비보셋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므비보셋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 다윗이 :

ㄱ) 현실적으로 실리적 안목으로 보는 눈과 종말론적 시야를 갖고 멀리 내다보는 눈이 있다.

ㄴ) 과거의 억울함만 생각하느냐? 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느냐?

ㄷ) 즉흥적으로 판단하느냐? 아니면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는냐?

ㄹ) 감정적으로 대하느냐? 아니면, 신앙적으로 대하느냐? 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신앙적 차원에서 합동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아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여러분에게는 므비보셋이 없나요?

다윗 그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미워하지 않았다. 욕을 받으면서도 욕하지 않았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예) (삼하 16:11 이하를 보면)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피신길에 나섰을 때 사울의 족속 중 시므이가 바후림에서

다윗을 욕하고 저주했다.

이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나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까,

이 때 다윗이 대답하기를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했다.

즉, 하나님이 욕하라고 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윗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시야로 판단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므비보셋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 :

사울 왕을 보고 므비보셋을 보면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요난단을 보고 므비보셋을 보면 왕자로 보인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고 원수를 보니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모든 관계를 덮어 놓고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 원수의 자손을 보았을 때

본문 (3절)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말은 은총의 종류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는 말이다.

이제 내가 베푸는 사랑은 내가 베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베푼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왕이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 속에서 된 것이니,

므비보셋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베풀겠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므비보셋은 원수 사울 왕의 마지막 자손이다. 그는 절뚝발이였다.

다윗은 1절에 - 사울의 집에 오리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그를 찾아 원수의 자손까지 씨를 말려 복수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리라고 했다.

(7절) 무서워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 찌니라

했다.

(8절) 므비보셋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사실 다윗은 므비보셋을 그냥 내어 버려두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을 사랑했다. 보잘 것 없는 대상을 사랑한 것이다.

누가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 (롬 5:6-10)

ㄱ)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6절)

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8절)

ㄷ) 우리가 경건치 아니할 때에, (6절)

ㄹ)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10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베푼 므비보셋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그림자이다. 다윗은 왕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대우는 즉, 왕의 밥상에서 같이 식사할

수 있는 최상의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므비보셋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함께 동참할 수 있게 하셨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사랑을 베풀 수 있었습니까?

1절과 7절 에 두 번 :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실 때에 예수님을 보고 우리를 보면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생각하고 므비보셋을 보면 죽이고 싶겠으나,

다윗이 요나단을 생각하고 므비보셋을 보면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실 때에 그냥 보시면 죽이고 싶겠으나 십자가를 통해서 보시면 살리고 싶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삶의 절대적 원칙을 하나 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십자가로 용서하셨다.

이 십자가의 눈으로 인류를 볼 때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라도 원수라도 병신이라도 이 십자가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달음이 부족해서 사랑이 안 되는 것이다.

은총을 아는 사람은 은총적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게 된다.

(예화) 엄마 얼굴이 얼거져서 동네 아이들이 놀린다.

알고 보니 내가 어릴 때 집에 불이 났다. 모든 사람이 만류하는 데도 너를 구하려고

들어갔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아직도 엄마가 원망스럽냐?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볼 찌 몰라도 엄마는 내게 있어 최대의 미인이에요

여러분 나를 위해 베풀어준 그 은총을 생각하고 엄마를 보니 불타서 상한

엄마의 얼굴도 사랑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옛날에 십자가의 형틀은 흉악범, 강도의 형틀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의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을 알고 보니

이제는 십자가는 자랑이요 긍지가 된 것이다.

똑같은 십자가인데 이렇게 보면 부끄러움이나, 저렇게 보면 자랑이 된다.

사람도 그렇다. 똑같은 사람인데 부정적으로 보면 단점만 보인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장점만 볼 수 있다.

(예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최대의 선물이 자기 딸을 주는 것이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호의를 받게 되었을 때에, 안 된다고 하니까

호의를 거절하면 죽이겠다고 해서 이를 해명하느라고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본문의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호의를 받았을 때 그 호의를 호의로 받았다.

속으로 “내가 저 왕위에 않을 수 있었는데” 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고 고백한다. (8절)

죄인의 괴수 같은 나를 하나님은 사랑하셨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우리가 은총을 받으면서 자격이 있다 없다 하지 맙시다.

은총이란? 자격이 없기 때문에 받게 되는 선물이다.

다윗도 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허물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

이미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줄 아는 다윗은 불쌍한 사람을 사랑했고,

원수의 손자까지도 은혜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랑해 주셨고, 허물이 있기에 사랑해 주신다.

(결 론)

당신이 다윗이라면?

과연 므비보셋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계속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다윗의 인간상은 참으로 놀라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윗의 폭 넓은 인간관계를 배웁시다.

사울을 생각하고 므비보셋을 볼 것이 아니라, 요나단을 생각하고 므비보셋을 보니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웃을 볼 때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 파란 선글라스를 쓰고 보는 세상은 모두 파란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볼 때

모두가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손해 본 것만 생각하고 상대를 생각하면 복수하고,

싶겠으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보고 원수를 보니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예) 요셉은 그토록 자기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형들을 약 20년만에 만나게 되었다.

전에 나를 구덩이에 집어넣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자기를 팔 때의 일을 생각하면, 복수하고, 죽이고 싶겠으나,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나를 이곳에 보낸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


사실, 형들이 원수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보니 은인이다.

하나님의 시야로 형들을 바라볼 때 모든 것이 감사하고,

나를 애굽에 판 것까지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일평생을 살면서 사람을 안다면 몇 명이나 알다가 죽겠습니까?

그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치 않다. 또 친하고 가까운 사람은 더 몇 명 안 됩니다.

몇 명 알지도 못하면서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마저 물고, 헐뜯고 서운한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잠깐 사귀다가 헤어지게 되고, 잠깐 알다가 떠날 인생들이다.

다윗처럼 은혜를 베풀고 모든 것을 좋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벧후 1:5) 믿음에 덕,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셨다.

믿음이 좋다고 칼로 짜르고, 감싸주지 못하는 것은 성숙한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덕 있는 인간관계를 맺고자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결심을 하는 심령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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