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 (전 7:15-18)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란?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말이다.
지나치지 않는 것이 복이다. Too Good to bad (너무 좋으면 안 좋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을 수 있다.
성격이 열정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하다보면
지나치게(Over) 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일도 지나치면 해가 될 수 있다.
(예)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몸에 좋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치게 먹으면 해가 될 수 있다.
(예) 노경 보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롭다.
죽을 때도 잘 죽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예) 친절한 것도 너무 지나치면 불편해 진다.
자녀들을 너무 사랑해서 광잉보호하면 자녀 교육에 역효과를 본다.
그렇다고 반대로,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된다.
하여간 지나치는(Over)것은 과유불급이 된다.
(예) 암(癌) : 한문 글자에 입(口)이 3개 있고, 그 밑에 산(山)이 있다.
3개의 입을 가지고 산(山)처럼 먹으면, 암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해가 된다.
(예) 잠 자는 것도 마찬가지다. 잠은 피곤을 풀어주는 보약이다.
잠을 안 자는 것은 해가 된다. 사람은 자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잠이 보약보다 더 낫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잠이라도 너무 많이 자면 그것도 해가 된다.
그러면 얼마나 자면 좋은가? 인간의 수면시간이 8시간이 좋다고 학교에서배웠다.
요즈음, 의학 보고에 의하면, 7시간 정도가 좋다고 한다. 그러니까 7-8시간이 좋다.
문제는 9-10시간 이상 자면 머리도 둔해지고 띵 해진다.
잠은 필요하고 피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면 그것도 해가 된다.
너무 많이 자면 두뇌에도 안 좋고, 정신 건강에도 안 좋고, 신체 건강에도 좋지 않다.
(잠 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고 했다.
(예) 운동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스마트 폰만 보고 있으면 건강에 안좋다.
너무 다리를 안 쓰면, 힘을 잃어버린다. 근육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걷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예화) 영화 빠삐용를 보니까, 주인공이 감옥에서 팔굽혀펴기를 열심히 해서
건강을 지키는 것을 보았다.
(예) 장수촌을 연구한 박상철회장의 말에 의하면,
고령사회의 특징은 첫 번째가 움직이는 것이다.
옛날 임금들은 너무 잘 먹고, 쉬고, 자고, 운동을 안 해서 대부분 일찍 돌아가셨다.
(당뇨, 콜레스트롤, 잔병치레를 많이 한 했다.)
(예) 아주 오래 전에, 한국 초기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땀을 흘리며 테니스 치니까,
저런 것은 종들이나 시키면 되지...?
왜 힘들게 땀 뻘뻘 흘리면서 고생하나...? 그랬답니다. (ㅋㅋㅋ)
건강을 위해서 운동은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운동도 지나치게 Over 하면 해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오늘 말씀에서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가르치고 있다. (16-17절)
(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는 것은 패망의 길이라는 말이다.
(17절)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지나치게 악행하고, 지나치게 우매하면 기한 전에 죽게 된다.
이 말씀은 당연하다고 생각도 되고 이해가 잘 된다.
그런데, (16절)이 문제다.
(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이 말씀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의(義)가 많을 수록 좋은 것이고, 지혜도 많을 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나치게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해석의 열쇠는 : 여기서 말하는 “지나치게 의인” 이란?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의(義)에 빠진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정말 지나치게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기의 의(義)를 품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잘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이 하나님이고, 재판관이다.
이런 사람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판단과 지혜가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가장 지혜로운데,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이렇게 자기 의(義)는 무서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된다. 아주 무서운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의롭게 해 준다는 칭의의 교리
(Justification by Faith)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의(義)로운데 무슨 구원의 선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예수님도 필요 없고, 칭의도 필요 없고, 회개 할 내용도 전혀 없다.
(예화) (눅 18장)에 아주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회개 기도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니, 회개할 것도 없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자기 공로, 자기 의(義)와 자랑거리만 늘어놓고,
오히려 세리와 비교하면서 그를 정죄한다.
문제는 주님의 판단이다.
(눅 18:14) 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그렇다면, 이제, 본문 (16절) 말씀이 이해가 될 것이다.
지나친 의인과 지나치게 지혜자란?:
자기의 의(義)에 빠지거나, 자기 스스로 지혜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화) 이스라엘 민족은 열심이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그 열심은 자기 열심이다.
(롬 10:2-3)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심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의 지식을 따라서 나온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義)와 지혜의 본체(실체)가 무엇이며?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義)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아니했다.
예수님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렇게 자기 의(義)는 무서운 것이다.
(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의에 빠져 사는 자의 결과는 패망이다.
★ 이 두 가지를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18절)이 해답이다.
(18절)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지나치게 악인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우매자도 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양자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다.
(결 론)
과유불급 (過猶不及) Too Good to bad.
지나치지 않는 것이 복이다.
(16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친 의인이란? 자기 의(義)에 빠진 사람이다.
지나친 지혜자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지혜자인 줄로 아는 자이다.
이 두 가지에서 벗어 나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다.
(18절)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잠 9:10). 패망을 면하는 길이다.
자칭(自稱), 의인도 되지 말고, 자칭(自稱), 지혜자도 되지 말자.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참 지혜자들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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