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 (엡 2:1-7)
우리나라 말에 “그림의 떡”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무리 좋은 떡이라도 그림 속에 있는 떡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아무리 좋아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끝날 수가 있다.
기독교의 진리와 생명이 이론과 관념으로 끝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기독교에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성령을 체험하고 실제의 생활 속에서 그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행복하고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이론이 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론이 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론이 있다.
성령의 역사가 있음도 믿는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이론과 교리적 신앙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이 갖고 있는 기독교가 그냥 이론으로 끝났습니까?
아니면, 그 하나님을 실제로 내 마음 속에 모시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관념과 이론에 그칩니까? )
하나님의 생명이 내 인생의 모든 삶 속에서 그대로 표출되고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열매란? 속에 넘치는 생명이 밖으로 표출된 하나의 결정체가 열매이다.
즉, 속에 있는 생명력이 밖으로 빠져나와 맺어지는 것이 열매이다.
죽은 나무는 열매 맺지 못 한다.
1) 낙심하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한숨만 푹푹쉬고 앉아 있고,
삶의 힘을 잃어버리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막연한 하나님으로 알고 습관적인 하나님만 알면, 이런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는다.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정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가 되어야 한다.
이 시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상처를 덜 받고, 험한 세상에서 밝고,
자신있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성경적 해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2) 가장 자리, 변두리 인생.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으니까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덜 받을 것 같은데,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이) 오히려 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오히려 더 쉽게 엘리야 선지자처럼 무기력증에 빠지고, 패배의식에 빠질 염려가 크다.
왜냐하면?
사회학자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들은 Marginal person (주변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가장 자리 인생(= 변두리 인생)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생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이 말의 뜻은 서로 다른 두 문화권에서 어느 문화권에서도 적응이 잘 안 되는 사람을 말한다.
(예화) 선교사들이 문화가 다른 나라로 파송을 받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파퓨뉴기아...
등등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결국 그 선교사는 자신이 자라 온 한국의 문화 배경도 있기
때문에 선교지에서 오래 살아도 그 나라 문화권에는 잘 동화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안식년이나 은퇴 후에 모국에 와 보면, 또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선교하던 나라에 동화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적응이 잘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도 여기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나가 보면, 나도 모르게 미국화 된
모습들이 있어서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주변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주변인, 가장자리 인생이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와 같은 가장 자리 인생이라는 말이다.
영적으로는 하늘나라 소속인데, 몸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거든요.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운 체질과 습관과 기독교적 문화를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냐? 라는 문제에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쉽게 상처를 받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거룩한 긍지와 자부심이 없으면 세상을 살면서 쉽게 낙심하게 된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면 세상에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 사람이 우리보다 앞서고 잘 나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죄악과 타협하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수 믿다보니, 어떤 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에서 산다.
(예화) 회사 회식 시간에 신자가 여러 불신자가 함께 어울려서 술잔을 나눈다.
이 때 고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럴 때 우리는 주변인, 가장자리 인생으로 앉아 있게 되는 것이다.
3)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
본문 4-6절 말씀이 너무 귀하다.
(4-6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 일으키셨다. 하늘에 앉히셨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3가지는 모두 다 분명한 과거형이다. 벌써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 우리가 믿는 것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사실이다.
(1-2절)은 예수 믿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1-2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시체와 같은 인생이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란 말이 중요하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사건이다. 나는 죽었고, 새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으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까?
죄 중에 살던 나는 죽었다. 실감난다.
그러나 하늘에 앉았다는 말은 실감이 잘 안 나지 않는다.
하늘이란 단어가 너무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늘은 3층천이다.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신 그 곳이다.
신비로운 세계의 나라. 육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하늘나라이다.
그런데 분명히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오늘 설교 내용은 잊어버려도 이 제목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땅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하늘에 앉았다는 말은 잘못하면 불순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 같은 위험성을 갖게 한다.
성경학자들은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을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것이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속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자 그대로 하늘에 앉혔다는 것을 좀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싶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이 3번 반복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우리와 독특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예수님과 나는 예수를 믿을 때 연합되었고 하나가 되었다. 결혼한 것처럼 하나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나를 하나로 보신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부활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도, 혼자 승천하신 것이 아니고,
나도 예수와 함께 승천해서 하늘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예화) 여기 성경책이 있다. 그 안에 볼펜을 넣는다.
성경책은 “예수님”이고, 볼펜은 “나” 라고 가정해 본다.
성경책 안에 볼펜이 있다. 이 말은 예수님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한 것이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한 것이고, 예수님이 하늘에 앉으셨다는 말은 나도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6절) 예수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나도 함께 있다고 보신다.
예수님과 나, 우리 둘은 하나이다.
하나님은 예수 없는 나, 내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주님과 내가 하나 되었다고 하는 놀랍고 신비스런 연합관계 속에서 살라고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은 하나의 막연한 생각이나 어떤 기운이 아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 계셔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 된 것을 증거해 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땅에서 살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듯이 나 또한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하늘에 앉아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는 사람이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고 그렇게 인식하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희미해 질 때는 다시 이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잠깐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너희는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이므로 그 사람답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 고 하셨다.
하늘에 앉아 사는 사람은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예) 백조가 돼지처럼 뒹굴고 있으면 더 비참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초연하게 산다.
그리스도인들이니, 세상에 동화될 수도 없고, 하늘나라의 영광도 누리지 못하고 살면 :
이것도 저것도 아닌 변두리 교인, 가장자리 교인은 우울증에 빠지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거룩한 자긍심을 갖고,
이 세상의 대단한 것을 보아도 별 흔들리지 말고, 나는 하늘나라에 앉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화) 비행기 조종을 배울 때 귀가 따갑도록 듣고 배우는 것은 :
일단 하늘에 비행기가 뜨면 당신의 감각을 믿지 말고, 반드시 계기판을 보라는 것이다.
당신의 감각과 계기판 중에서 내 감각은 비행기가 내려가고 있다 생각되어도
계기판이 수평으로 가고 있다고 하면 두려워 말고, 감각보다 계기판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늘에 앉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성경이라는 계기판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감각에 따라, 느낌에 따라 살다가는 그냥 처 박혀 죽는다.
내 기분 좋은 대로 끌려가거나, 내가 좋아하는 대로 가지도 말고,
많은 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 가지도 않는다.
오직 하늘나라 계기판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 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앉아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어렵고 힘드시나요?
그래도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답게 여유를 갖고, 웃어가며 살기 바랍니다.(살전 5:16-18)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변두리 인생처럼 볼찌라도, 거룩한 프라이드(pride)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참된 영적 정체성을 깨닫고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고, 소망이 있고, 승리의 길이 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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