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4일 목요일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 / 행 21:11-14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 (행 21:11-14)


(행 21:11-14)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살면서, 3차례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려고 했을 때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1) 첫째는 : 인편(人便)에 들려오는 흉한 소식이다.

예루살렘의 공기가 험악해서 지금 바울이 올라 가면, 신변에 위험하게 될 것이다.

2) 둘째는 : 성령의 계시(啓示)이다.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3) 셋째는 : 형제들의 만류(挽留)이다.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상경하지 말라고 눈물로 말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왜 그랬을까?

모든 상황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몰라도, 다 알면서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강행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1) 알림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결박과 환난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린다고 알려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당초에 계획한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간 것이다.

성령의 알림과 성령의 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경우, 성령의 알림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선택하고 처사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알려 주신 것은 나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뜻일 것이라고 속단해 버리고 만다.

(예화)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으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과 같은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는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것을 일축해 버리고, 흔연(欣然)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2) 인정(人情)애정(愛情)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 형제들이 울면서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만류한 것은 인정이지,

애정이 아니다. 즉, 인간적인 정(情)이지, 사랑의 애정(愛情)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과 애정을 혼동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정(情)에만 치우쳐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정(人情)이지, 애정(愛情)이 아니다.

애정진리를 추구하고 공의를 실현하도록 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승리

취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그러기에 애정은 인정처럼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화) 한번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하여 십자가를 지시지 말라고 만류했다.

여기에 [간하여] 라는 말은 책망하듯이 라는 말이다.

이렇게 만류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정의 발로일 뿐이지, 애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왔는데,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꿈도 다 사라지는 것을 걱정한 것도 있다.)

만일, 예수님이 베드로의 간한대로 하셨다면, 예수님은 실패자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인정에 이끌려서 하면 안 된다.

그러기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마 16:23)

사도 바울도 이것을 알고 만류하는 형제들의 눈물에 동요될 수 없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저들의 만류를 단호히 물리치고, 예루살렘 행을 단행한 것은 잘 한 일이다.

3) 고집(固執)충성(忠誠)은 다르기 때문이다.

고집자기의 뜻을 관철하려는 자기 주장이요. (인간적인 뜻)

충성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자기 희생이다. (하나님의 뜻)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집은 부리지 말고, 충성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어코 단행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잘못 생각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이 있다.

1) 알림은 같은 것이 아니다.

2) 인정(人情)애정(愛情)은 같은 것이 아니다.

3) 고집(固執)충성(忠誠)은 다르다.

우리는 결정하기 전에 항상 다윗처럼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의의 길, 진리의 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오라 하시면, 주가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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