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속성) 롬 8:31-39, 고전 15:10
영국에서 이런 토론이 있었다.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어떤 면이 결정적으로 다른가?
ㄱ) 사랑이다. 그것은 불교에도 대자대비가 있지 않은가?
ㄴ) 공의다. 그것은 이슬람교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선행하면 천국가고, 악인은 지옥간다고 한다.
ㄷ) 그러면 성육신 교리다. 그것은 서구 신화에도 많이 나온다.
(예) 신라 박혁거세 (알에서 태어남)
◉ 그 토론 광경을 보던 C. S. 루이스 기독교 변증학자 : 간단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은혜>이다. 다른 종교에는 <은혜>라는 말이 없다.
<은혜>라는 말은 기독교의 핵심 단어이고, 기독교의 특징이다.
오늘 은혜의 속성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 전에 3종류의 인생관 및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인생관이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세계관이라고 한다.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3종류의 인생관 (세계관)
(1) 운명론적 인생관 (세계관)
인생은 이미 주어진 운명대로 살게 되어 있다는 인생관이다. (프로그램되어 있다)
태어났으니 살고 모든 것을 운명으로 생각한다. 숙명론이라고도 한다.
철학자 하이데카 : 던져진 생이다. 난 자유가 없다.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죽어지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생을 사는 것이다.
운명론적이고 숙명론적인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인생을 고민하거나 생각할 필요 없다.
세상이 어쩌니... 나라가 어쩌니... 고민할 필요 없다. 어짜피 내 생은 요것뿐이니까.
실존적 운명론적 세계관이다.
(2) 율법적 인생관 (세계관)
모든 것은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세계관이다. 인생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
선을 심으면 ➡ 선을 거두고 , 악 ➡ 악,
의 ➡ 복, 악 ➡ 저주를... 거둔다.
모든 것은 내가 심은 대로 보상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율법적 인생관이다.
불교의 업보란? = 본인이행한 일에 대한 결과로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
인생이란? 인과응보(因果應報) 이란 말이다.
(3) 은혜중심의 인생관 (세계관)
모든 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세계관이다.
우리가 힘도 쓰고, 노력도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인생관이다.
본래 <카리스>라고 하는<은혜>라는 말은 율법적 관계에 대한 반대적 개념의 용어이다.
율법적이냐? 은혜냐? 하는 명제에 대한 것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제이다.
오늘도 율법적 관계에다가 나를 세워 놓으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죄인이고 살길이 없다.
그러나 은혜의 관계에다가 나를 세워 놓으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구원이고 생명을 얻는다.
은혜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 은혜의 속성은
1) 무조건적이다.
은혜라는 말은 그 자체가 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너는 안 돼. 너는 이래서 안 되고, 너는 저래서 안 돼, 이런 말이 없다. 무조건적이다.
구원 =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나의 수고, 노력과 상관없이 거져 Free로 주시는 것이 <은혜>의 선물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화) 마더 테레샤의 [아름다운 선물] (책) : 방갈로 수도원 수녀가 편지를 썼다.
당신은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고하며 사랑을 베풀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성품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냐?
계속 받기만 하면 인간성이 망가지는 것이 아닌가요?
테레사 수녀의 대답 :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계속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거져 주는 은혜만 받다 보면 성품이 잘못될 것 같다.
(예화) 가끔 LA 길거리에서 동양하는 걸인들을 만난다. 돈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돈을 주면 마약 사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고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2) 무제한적이다.
한이 없다. 제한이 없다. 모자람이 없다. 한량없는 은혜이다.
(예) 나이아가라 폭포의 끝도 없이 떨어지고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같다.
[은혜] 라는 말의 가당 가까운 표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 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무조건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이 [은혜] 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오늘도 은혜로 붙잡아 주소서 ] 이렇게 기도 합시다 .
3) 은혜의 속성은 선수적(先手的)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어졌다. 부어짐이 먼저이다.
감사할 줄도 모르는 자에게 이미 은혜를 주고, 은혜를 받아도 깨닫지도 못하지만 일단 먼저
부어 주신다. 이것이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이다. 은혜는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알게 한다.
알게 하고 그 다음에 주는 것이 아니고, 먼저 베풀고 그 다음에 은혜를 알게 한다.
(고전 15:10)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예화)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납니다. 그러나 잘 모른다.
받은 것은 많고 아는 것은 적다. 그러나 나중에 자기도 자식을 낳고 보면 안다.
지금은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잘되는 길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는 안다. 그 사랑을 안다. 지금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고 나아가면 그것이 축복이고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감격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은혜의 속성이다.
은혜를 다 알고 사는 것이 아니다. 깨닫는 것은 훗날에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주시고 뒤에 깨닫는다.
그러니 먼저 은혜 주신 줄 믿는 사람은 깨닫기 전(前)이라도 감사할 수 있다.
(예화)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를 받았다.
병고치는 신유의 은사, 말씀의 능력도 있었고, 3층천(낙원)에도 다녀왔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 (간질병)가 그 몸에 있었다. 부끄러웠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3번 특별 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해는 안 되지만 믿었다. 이제는 깨닫게 된다.
알고 보니 그것이 은혜라는 말이다.
모든 은혜와 은사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겸손>의 은혜이다.
나를 작게 만들어서 교만하고 싶어도 교만할 수 없도록 만드신 것이다.
나의 자랑은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겸손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데 까지 도달했다.
건강, 물질, 자녀, 가족, 형통, 지혜... 다 은사요 은혜이다.
그런데 가장 좋은 귀한 은사는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이다.
내 성품에 오는 것이다. 내 영혼에 오는 것이다
부자가 축복인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축복인가?
출세가 축복인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축복인가?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은사를 주시고자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
(예화) 에디슨(발명왕): 그는 30대부터 귀에 문제가 생기더니 40이 넘으면서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귀머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된 것이다. 고 말했다.
그러므로 귀머거리가 은혜요, 은사였다.
(예화) 크로스비 여사 : 수 많은 찬송 시를 작사 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우리 찬송가에 17곡이 있다.
그런데 그 분은 어느 날 시각장애인(소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 분은 감사했다. 날 소경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 것 보지 않고, 하늘나라만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영적 시상이 터져 올라왔다. 일생동안 찬송가 4,000개를 작사했다.
세상 보는 눈은 거두어 가시고,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을 주셨다고 감사한 것이다.
그래서 <소경>된 것이 = 은사요. 은혜이다.
항상 하나님은 최고의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때때로 불만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령한 것, 영원한 것,
더 큰 것, 더 위대한 것, 더 온전한 것을 주시고자 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데 우리는 믿음이 없고 깨달음이 없어서 불안하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최고의 은사를 소개 하고 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다고 했다.
십자가는 최고의 은사이고, 최고의 선물이다.
아들을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 물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십자가 이전의 세상 = 율법적 세상이고, 저주 받은 생이다.
십자가 이후의 세상 = 어떤 시련을 당해도 이것은 <은사>이고 <은혜>이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모르나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조금만 더 인내 해 봅시다.
그 사건이 은사였고, 은혜였고,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큰 은혜를 깨닫는 순간 세계관, 인생관이 확 바뀐다.
모든 것이 은사요, 은혜임을 깨닫고 또 축복으로 인도하심을 알게 되면서
감사, 감격하게 된다. 그리고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벌써 받았다. 이미 받았다. 문제는 깨닫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아낌없이 더 주고자 하신다. 믿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다.
받았으나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섭섭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의 손길, 섭리의 손길을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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