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요나서 1:1-17)
요나서 1장을 읽어보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본문의 배경은 :
앗수르 왕국의 수도, 니느웨는 마술과 요술, 잔인한 살인 행위, 우상숭배, 사기,
성도덕의 타락... 등으로 여러 가지 악과 죄가 가득 차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이 니느웨로 파송하여 그 죄악으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가기가 싫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원수나라이다.
조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조공 바치는 것도 원하지도 않았고, 민족적 감정 때문에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니느웨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마침...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마치 도망가도록 준비된 것같은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도망가는 요나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태풍을 바다에 일어나게 하셨다. 풍랑은 점점 더 심해진다.
배는 거의 깨어지고 그 배에 탔던 선객들은 두려움과 극난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부터 우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이 난파선상에서 보여준
선객들의 행동에서 배울 수 있다.
(5가지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을 찾아보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 신을 부르는 인간의 본성 (욘 1:1-6)
(욘 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명하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다 위에 태풍을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난파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 때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 신들을 부르고 있었다.
풍랑만난 제자들도 주님을 깨우며 도와달라고 하였다.
(막 4:38)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인간은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되면 신을 찾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어진 위기 앞에 아주 민감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 때 저들은 이 두려움에서 자유하기 위하여 각각 자기들이 믿는 신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의 발로이다.
사도 바울은 철학의 도시 에덴에서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발견했다.
(행 17:22-23)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
에게 알게 하리라
헬라 민족의 온갖 철학적 지식과 계몽, 그리고 쾌락주의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 헬라인들
에게 줄 수 있었던 온갖 철학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아덴의 시민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신을 모시고 싶은 영적이요, 종교적인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의 기원이 신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섬기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문제는 죄로 인하여 타락한 결과 그 순수한 종교성의 본능이 잘못 작용하여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롬 1:23)
2) 재물보다는 생명을 우선하는 인간의 본성 (욘 1:4-10)
각자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도움을 구한 그들은 그 다음에 했던 행동이 무엇인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다고 했다. (5절)
(욘 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사람들은 물질이냐? 생명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였을 때에는 서슴지 않고,
목숨을 택하고 재물을 내버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6) 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예리하고 판단력이 빠르고 결단력이 강하다.
그 이유는 목숨이 재물보다 더 우선한 것이며, 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3) 재앙은 심판이라는 인간의 본성 (욘 1:4-7)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가항력적인 재앙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는
인간의 본성이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게 되자 이렇게 서로 의논했다.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고 했다.
사도 바울이 탔던 배가 폭풍을 만난 후에 선객들은 모든 기적적으로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상륙하게 되었다. 마침 비가 오고 날씨가 차가워서 떨고 있던 차에 그 곳 섬의 토인들의 따뜻한 온정으로 나무를 가져다가 불을 피웠다.
그런데 불을 피우던 한 나무 속에서 독사가 나와서 사도 바울의 손을 물었다.
그 때 그 곳의 토인들이 바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실로 이 사람은 살인자라서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의 신이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곧 자기 손을 물고 있던 뱀을 불에 던져 넣고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때 그들은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신이라고 했다. (행 28:1-6)
어떤 경우이든지 이 세상 사람들은 재난을 당할 때 그 재난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 고 생각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예) 욥의 경우도 친구들이 와서 하는 말 :
네가 죄가 있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고 힐문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그 재앙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가는 범죄자를 색출하기로 했다.
다시 말하자면 신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한 종교적 수단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방 종교 행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예) 기우제, 안택, 평안제... 등등 무수한 종교 행사는 인간이 만난 재앙은 인간들의 죄로 인한
신들의 노여움이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야 한다는 초조한 종교 심리적인 현상의 발작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오셔서 인간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에서 내리셨다.
하나님이 스스로 형벌을 받으시고 죄를 면케 해 주셨다.(이사야 53:4-6)
4) 신을 거역하면 못 산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 (욘 1:6-10)
하나님은 다시스로 항해하는 바다 위에 태풍을 몰고 와서 불순종하고 도망가는 요나를 현장에서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하여 배 밑 층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요나를 깨우게 하고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다. (6절)
그 사람들에게 제비를 뽑아 범죄자 요나를 색출하게 했다. (7절)
(7절)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이제 요나는 범죄자로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생업이 무엇이냐? 국적, 행방, 민족...
그리고 재앙의 연고 등등을 심문 받게 되었다.
마침내 요나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을 가다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고 자백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이 풍랑과 재앙은 나의 연고 때문이고,
나의 불순종 때문이라. 고 고백했다. (9-12절)
그 때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고 질책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질책은 <당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도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느냐? 하는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분별한 소행이냐? 하는 말이다.
실로 인간의 본성은 신은 신을 거역하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 하고, 적극적으로는 신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 얼마나 많은 종교 현상들이 이런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결국 저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신을 거역한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14절)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 말하기를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일에 대하여, 그 죄책을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14절) 이 얼마나 초조한 종교심의 발동입니까?
5)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 (욘 1:11-16)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 전에 또 이런 말을 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생욕(生慾)은 본성이다. 즉, 생욕이란?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살라고 하는 생명(生命)을 받았다. 사실상 모든 생명체는 생욕이 있다.
이러한 예는 요나서 3장에서도 볼 수 있다.
요나가 니느웨성 길을 하룻길 쯤 걸어가면서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하는
니느웨의 종말을 경고했다.
그 때 니느웨 백성, 곧 왕과 모든 백성들이 통회하며, 금식하면서 망하지 하지 말고,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자복하며 빌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욕, 즉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다.
(결 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위경을 당할 때, 신을 부르게 된다.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인간은 재물이냐? 목숨이냐? 할 때 단연코 생명 쪽을 택한다.
인간은 불가항력적의 재앙을 만났을 때 이것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다.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은 종교적인 본성이다.
문제는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 본성이 인격적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 되게 하셨다.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 동정녀 처녀의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오시게 하였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를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였다.
영원하신 성령의 역사는 구원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게 믿음을 주신다.
사도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새롭게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는 본성은 종교적 본성이다. 그것은 생명성이다.
그것은 과학 이상, 철학 이상, 물질 이상의 신비한 실존적 현상이다. 그것은 영성(靈性)이다. 영은 영으로만 만족된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성령만이 인간 본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성삼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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