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자. (민수기 13:25-33)
사람은 크게 나누어 2종류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
2) 오늘을 살지만 미래에 사는 사람 즉,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
우리는 항상 현재라는 시점에서 먹고, 자고 살지만, 그래도 우리의 생각은
과거에 매여 있든지, 미래에 있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살지만, 우리는 항상 저 미래를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산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본문은 정탐군들이 40일 동안 정탐한 후에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이다.
보고 내용은 :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27절)
그 증거로 그 땅의 과일을 가지고 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가 문제이다.
(28절)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러한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갈렙이 나서서 말한다. (30절)
(30절)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여러분 ! 조용히 하세요. 우리가 지금 올라갑시다.
반드시 그 땅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러자, 다른 10명의 정탐군들은 : (불신앙의 말을 한다)
(31절)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12명의 정탐군들이 40일 동안 동일한 기간에, 동일한 장소, 동일한 사람들을
보고 왔으나, 그 평가와 반응이 달랐다.
★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3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실패가 당연하다고 하는 패배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10명은 능히 올라가서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하지요?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성읍은 견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패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니까 ➡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패배는 당연하고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럴 때 한국에서는 <당근>이라고 말한다. (ㅋㅋ)
인생을 살다보면 당연한 것이 있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 공부하지 않아서 대학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일하기 싫어서 백수로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야식을 즐기면 뱃살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당뇨환자가 아무 음식이나 막 먹으면 당수치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실패가 다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10명의 정탐군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의 약함과
자신의 실패와 자신의 아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굉장히 운명론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 <운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언어가 아니다.
운명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언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운명에 맡기고 삽니까? 아니다.
그런데 우리 성돌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넘어짐과 인생의 실패와 약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운명론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
10명의 정탐군들은 그 성읍이 견고하고 그들이 강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당연하게
여겼지만, 정말 그랬습니까? 4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그 땅에 들어갔다.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것이다.
여러분! 모든 것이 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미리 포기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눈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너무 빨리 포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는 것이 문제이다.
(예) 내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어...
나 같은 장애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노...?
누가 나 같은 사람에게 프로포즈를 하겠어?
누가 나 같은 사람에게 일 할 기회를 주겠어...?
너무나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를 실패와 약함과 아픔으로 단정해 버리고 살아간다.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이것이 내 운명이야, 이것이 내 팔자야...
그러나 보세요.
장애를 가졌으나 믿음으로 그 장애를 이겨내고, 선한 영향력 있는 시람으로 더 멋지게 살아가며
도전을 주는 훌륭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 닉 브이치치 : 태어날 때부터 두 팔, 두 손이 없다. 다리도 없고 발만부터 있다.
그런데, 수영도 하고, 골프도 하고... 발가락으로 글씨도 잘 쓴다.
(예) 이지선 자매 : 교통사고로 3도 화상을 입었다. 10번 넘는 대 수술을 받았다.
(예) 레나 마리아 :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는 짧다. 그런데 못하는 것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위로와 격려를 주는지 모른다.
장애인들만이 아니다. 오늘 내가 처한 상황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원래 이것 밖에 없잖아... 나는 원래 이런 놈이지...
나는 흙수저야... 금수저 아니야... 나는 원래 배우지 못했잖아...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어?
이렇게 살다가 인생 끝내는 거지... 뭐...?
여러분 ! 이것은 아닙니다.
(예화) 우리 교회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지 못했다는 것,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 자신의 과거의 상처...
이런 것들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내 운명이라고 믿고, 받아들인다.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의 실패와 연약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미래를 향하여 <도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당연한 것도 있지만, 모든 것이 다 당연한 것은 아니다.
오늘 상황을 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감사할 것이 별로 없다. 생각해 보세요.
ㄱ) 오늘 숨 쉬고 있는 것 :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까?
중환자실에 가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ㄴ) 걸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주일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 되세요?
목소리 높혀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되세요?
(예화) 어떤 분이 목에 암이 걸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래요.
그 때 깨달은 것은 내가 찬양하고,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고, 내일을 향한 도전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볼 수 없다.
2) 스스로 메뚜기 콤플렉스 같은 열등감을 버려야 한다.
(33절)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질문해 봅시다.
가나안 사람들이 실제로 이스라엘백성들을 보면서 그들은 정말 메뚜기 같네...
그렇게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떨고 있었다.
홍해 바다를 가르고 육지처럼 건너왔고, 아말렉을 물리친 소문을 듣고 떨고 있었다.
(수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은 기생 라합이 한 말이다.
두 사람의 정탐군에게 이 나라의 분위기를 말해 준 것이다.
상천하지의 하나님이 함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수 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상천하지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그들이 우리를 볼 때 <메뚜기>같고 말했다.
<메뚜기>는 광야에서 사는 작고, 연약하고, 시시하고, 무가치한 곤충을 상징한다.
그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스스로를 메뚜기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메뚜기 콤플렉스라고 한다. 메뚜기 자아상이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같은 존재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존귀한 백성이다.
10가지 재앙으로 구원해 낸 백성이다. 홍해를 건넌 백성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온 백성들이다.
하늘의 만나로 먹이신 특별한 민족이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을 <메뚜기>같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가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백성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행복의 기준은 = 구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아파트 평수, 자동차 종류, 건강, 재산...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 구원이다.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이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결코 메뚜기가 아닙니다.
옆 사람에게 ➡ <당신은 메뚜기가 아닙니다.>
메뚜기 자아상이란?
스스로를 작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메뚜기 자아상을 버려야 한다.
따라합시다. <나는 결코 메뚜기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 안에 주님이 와 계신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화) 목사로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있다.
“목사님 ! 저는 예수님 때문에 너무 행복해요.” 라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이 가장 듣기 좋다. 적어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는 행복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저와 여러분은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 입니다.
왜냐하면,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가장 먼저 신분이 바뀐다. 그리고 존재 가치가 달라진다.
성경을 보면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을 받은 질그릇이다.
질그릇은 연약한 그릇이다. 조금만 부딪혀도 깨어진다.
그런데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릇의 가치는 금이냐? 은이냐? 가 아니라,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비록 질그릇이지만,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면 :
내 인생의 가치는 예수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믿습니까?>
남들이 볼 때 화려하지 않아도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 때문에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다. 내 인생의 존재 가치는 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순간 여러분의 존재 가치는 여러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여러분은 연약한 메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 사실보다 관점이 더 중요하다.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온 그들의 보고는 = 사실이었다.
거짓이 아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성읍은 견고했고, 그들은 장대하고 강했다. 사실은 사실이다.
문제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시각이 달랐다.
10명은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보고 해석했다. 현실의 눈으로만 바라 본 것이다.
자신들의 눈으로, 자신들의 관점으로,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니까 :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고,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관점>이 달랐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바라보니까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리라.
<당연히> 그런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우리의 <밥> <먹거리>이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여러분 ! 인생을 살다보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난다.
욥처럼 이해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실패 할 수도 있다. 시험에 넘어질 수도 있다.
불의의 질병과 사고도 당할 수 있다.
여러분 가운데,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시험에 넘어졌습니까? 부도가 났습니까?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이다.
사실은 사실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것은 <현실>이다.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실 자체보다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중요하다.
어떻게 받아드리고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실패, 나의 연약함, 나의 아픔과 상처를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나면 안 됩니다. 거기서 끝나면 10명의 정탐군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
오늘 내가 인생 가운데 일어난 현실과 사실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데 사탄은 어떻게 하는가?
연약한 내 모습만 보게 한다. 불행한 현실만 보게 한다.
사탄은 언제나 내게 없는 것만 보게 만든다.
내게서 사라진 것, 아쉬운 것, 없는 것만 보게 한다.
사탄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너는 끝이야, 너는 끝장이다. 너는 안 돼>는 부정적인 말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말은 :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다시 해 보라. 다시 시작해 보라>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다시 시작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있는 문제만 보게 만든다. 문제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어려운 현실만 보게 한다. 없는 것만 보게 한다. 풍랑만 보게 만든다.
주님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가 풍랑을 보는 순간 빠졌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내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기도하면,
모든 것이 끝장 난 상황 가운데 있을 찌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손바닥 만한 구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만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 찌라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현실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인생을 사는 동안에 왜 문제가 없겠어요? 왜 사건, 사고가 없겠어요?)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상황 앞에서 어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보다 관점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 론)
1) 실패가 당연하다고 하는 패배의식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고, 내일을 향한 도전도 없다.
하나님의 일하심도 볼 수 없다.
2)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하는 열등감(메뚜기 콤플렉스)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자이다. 여러분은 연약한 메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 사실보다 관점이 더 중요하다.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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